게임 리터러시라는 단어 자체를 산업 내 사람이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게임 리터러시가 추구하는 목적이 단어 자체, 즉 개념의 전파가 아니라, 우리 신문화(게임 문화와 e스포츠)에 대한 교육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게임 리터러시에 대해서 글을 적어야겠다는 결심하게 된 계기를 설명드리면 e스포츠가 게임 리터러시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이유가 첫 번째입니다. 도리어 매우 관계가 깊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우리는 이 게임 리터러시에 대한 방향 설정에 대한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가 소유한 개념인 게임 리터러시는 게임을 사용하는 데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잘 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게임 리터러시는 그 개념에 대한 한계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접근을 시도하는 데에 좋은 도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임 리터러시 관련 교육을 진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최소한 명확한 개념과 이해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접근해온 방식은 게임을 사용하는데 방식에 치중했습니다. 소비자가 올바르게 게임 문화를 이해하고 스스로에 기반한 자율 규제로 게임을 통제할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진채 이 과업을 집중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는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과 게임을 소비하는 사람이 상호 이해가 제한되어 있거나 부족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게임은 명백하게 산업이고 비즈니스입니다. 그와 동시에 게임 과몰입으로 인한 폐해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현재 분명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그로 인해서 사회 병리 현상이 발생합니다. 불행히도 고통받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적 약자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게임을 소비하는 것을 하나의 문화로 볼 것이냐 아니냐', '마찬가지로 소비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보고 규제할 것이냐, 자율규제할 것이냐'가 아닙니다. 핵심은 우리 삶 속에서 존재하는 게임이라는 이름 자체의 개념에 대한 이해입니다.
따라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현대인의 삶의 패턴을 조사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필요한, (*정확한 의미의 게임 리터러시), 현대인의 삶의 패턴을 정확한 관점을 가지고 조사하기 위해서는, (유의미한 데이터 추출을 위한 목적 달성을 위해), 전문적인 학술적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4차 혁명과 그 중심에 있는 플랫폼에 대한 이해, 21 세기 디지털 콘텐츠의 발현과 소비 대한 이해, 인터렉티브 등 신 기술 방향과 목표, 인문학적 관점에서의 소비문화란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보다 총체적이고 중계자적인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2018년을 사는 가장 전형적인 그 한 명의 게이머를 정확한 분석을 토대로 추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그 한 명을 중심으로 우리는 전체 게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리터러시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필자는 이 한 글로 인해 게임 리터러시에 대한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를 집중적으로 준비하는 사람들의 옆구리를 살짝 찔러 본래의 방향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조심스럽게 소망해 봅니다.
(아이) 엄마! 스마트폰이 뭐야?
(엄마) 어 엄마 어렸을 적에는 스마트폰이라고 네모난 손바닥 만한 기계를 다들 하나씩 들고 다녔었어
(아이) 와! 그걸로 게임을 했던 거야?
(엄마) 원래는 다른 사람이랑 통화를 하는 용도인데, 메시지도 보내고, 아들 말처럼 게임도 하고 그랬어
(아이) 엄청 구려보는데 이름은 스마트네
(엄마) 그래? 그래도 엄마는 저것도 이것저것 많이 했었어, 참 편리하다고 느꼈었지, 근데 어떻게 알았어?
(아이) 아! 여기! 옛날 유튜브 보니까 저런 거 들고 게임하더라고 그래서 물어본 거
(엄마) 도티 보고 있었구나? 엄마도 어릴 때 많이 봤었지, 하루 종일 이것만 본다고 할머니한테 혼났었는데
(아이) 왜 혼났어?
(엄마) 글세, 할머니는 스마트폰으로 이런 영상을 보는 것이 엄마를 망치는 거라고 생각한 거 같아.
(아이) 음... 그럼 뭘 보는 건데?
(엄마) 꼭 무언가를 본다기보다는... 아마도 할머니는 지금 우리가 어떠한 환경에서 생활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던 것 같아. 할머니의 엄마도 할머니가 하루 종일 TV만 본다고 혼냈다고 하시더라고, 아마도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것은 미지의 세계니까. 지금 아들과 내가 사는 세계는 도저히 보고 듣지 않고는 필요한 정보를 정확한 타이밍에 얻을 수가 없잖아? 그런데 엄마가 어릴 적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어, 물론 글을 몰라도 음성 버튼을 누르고 음성 검색을 하면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긴 했지.
(아이) 헐! 음성 버튼을 눌러서 검색을 하는 뭐 그런 거야? 안드로이드(AI)가 없었어?
(엄마) 안드로이드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똑똑하지는 않았지, 아.. 아마도 넌 영원히 이해를 못하겠다.
이 대화는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 딸 지아(6살)가 최소 같은 나이의 아들(저에게는 손자)을 낳았을 먼 미래에 어느 날 서로 나눌만한 대화를 미리 상상해 본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대화에 끝에, "엄마! 그럼 지금부터 VR 한 시간만 해도 돼?"라고 아이가 물으면 엄마가 "안돼! 아까도 했잖아, 그러다가 가상현실 중독자가 될 거야"라고 하는 내용을 넣을까 말까를 오랫동안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넣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와의 대화에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래의 대화를 바탕으로 오늘날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2018년의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우리 딸 지아는 과연 스마트폰과 게임을 사이에 두고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반대로도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자녀와 과연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게임 리터러시는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6살은 아직 너무 어리다는 판단입니다. 6살의 아들이나 딸이 엄마와 스마트폰 또는 게임 문제로 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은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의 자아가 충분히 엄마를 거역할 정도로 자라지 않았다는 판단에 근거합니다. 또한 아주 잘 다룬다고 해도, 아직 많은 것을 활용하기에는 인지능력이 부족합니다. 사용하는데 한계가 있다면 매력도는 빠르게 감소하고, 매력이 한번 감소하게 되면 그만두는 것도 쉬워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영원히 이 나이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몸(flesh)과 마음(mind)이 자라남과 동시에 자아(ego)도 성숙하게 되고,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이 많아지며, 급기 하는 엄마를 거역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엄마와의 충돌에 있어 자주 매개체가 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면 엄마는 당연히 스마트폰 탓을 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어린 우리 아들은 착했었기 때문입니다. 자! 나이 때를 조금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화#1
(엄마) 구몬 했어? 받아쓰기는? 동화책 읽었어? 엄마가 해야 할 거 먼저 하고 그다음에 게임하라고 했지!!
(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엄마만 쳐다봄!)
(엄마) 이게 다 스마트폰 때문이야. 내가 너 다시는 주나 봐라, 당신도 절대로 핸드폰 주지 마!
(아빠) 나도 어렸을 적에 숙제 안 한적도 있었고, 저학년 때는 공부도 별로 못했었어, 근데 지금 문제없잖아!
(엄마) 그때와 지금이 같아? 또 그 나이에 해야 할 것 못했다고 말하는 게 자랑이야?
대화#2
(엄마1) 우리 애는 책 읽는 거 좋아하고 레고 블록 같은 것을 많이 사줘서 스마트폰을 거의 아예 안 줘요
(엄마2) 에효, 우리 애는 맨날 스마트폰만 해서 그런지 받아쓰기를 70점 이상을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엄마3) 맞아요, 스마트폰이 애를 망침, 안 주려고 해도 또 안 줄 수도 없고,
(엄마1) 한번 독하게 마음먹고 안 주기 시작하면 안 줄 수 있어요. 엄마 하기 달린 듯함.
(엄마2/3) 정말 그럴까요? 그럼 우리 애가 달라질까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그 전과는 달리 급격하게 빠른 속도로 사회 활동이 전개되고 그 속에 아이는 뒤처지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이는 첫째 아이일 수 있으나, 같은 반의 다른 아이는 당연히 형이나 누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상위 문화가 하위문화로 전파되는 속도는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걷잡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정상적으로 성숙한 우리 아이는 이처럼 탑다운 식으로 내려오는 새로운 문화를 매일 접해야 하지만 적응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문화는 그 문화권에서 생활하지 않는 엄마는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엄마는 엄마보다 10살 정도 어린 20대 후반 처녀들의 문화도 100%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같은 멜로드라마를 동시간에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입을 다물수밖에 없습니다. 엄마는 지금 이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지만) 엄마는 외계어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고 아빠도 정확히 아이를 설명하고 있지는 못함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이는 가끔 질문합니다. 엄마 "XX새끼"가 무슨 뜻이야? 아마도 적응은 하지만 이해를 100% 하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아이는 아마도 자신의 실제 세계(사회)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보다 더 많은 이해를 하기 위해서 가장 믿음직스럽고 친근한 사람인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또 외계어를 시작합니다. "너 그 말 어디서 배웠어? 유튜브에서 배웠지? 내가 못살아! 내가 너 그런 거 보지 말라고 했지, 내가 다시는 스마트폰 주나 봐라!" 아이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엄마의 이와 같은 대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이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승리는 항상 강자인 엄마가 하게 됩니다.
이러한 형태의 불통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아이에게 보다 더 스마트폰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합니다. 스마트폰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스마트폰은 나쁜 것의 온상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말했듯이 스스로는 원래 착한데 스마트폰을 해서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악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엄마에게서 나쁜 아들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아이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도저히 스마트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 때문에 엄마에게 혼나고, 스마트폰을 할 때면 엄마를 피하게 되고, 하고 나서도 자괴감에 빠집니다. 그런데 아이는 언제까지나 사회적 약자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약자이기 때문에 엄마가 소리만 질러도 지레 겁을 먹지만, 조금만 지나면 키가 엄마와 비슷해지고, 그때는 용돈을 끓는다고 말해도, 외출 금지라고 말해도 더 이상 겁을 먹지 않습니다. 다만 그동안 약자일 때 쌓인 자괴감이 분노가 되어 표출됩니다.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치닫기도 합니다.
아이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당연히 대부분 부모에게서 기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세상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의 해결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내 탓인가 하는 문제의 영역이 아니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의 영역입니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해야 내가 내 아이를 올바른 형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제 해답을 찾습니다. 우리의 전형적인 2018년의 게이머에 대한 추적은 아마도 여기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제야 비로소 엄마가 아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엄마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손쉽게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사회입니다. 당신은 지금 게임 리터러시 교육을 진행하려고 하십니까? 그럼 사회의 책임을 대신 감당하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21세기 디지털 세계를 포함한, 우리들이 사는 진짜 세상(world)을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 딸 지아와 아들의 대화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엄마 스마트폰이 뭐야?" 아마도 미래의 제 손자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을 들고 있지 않는 듯합니다. 미래의 우리 딸의 삶 속에는 스마트폰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스마트폰에서 얻은 경험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와 그걸로 게임을 했던 거야?" 아마도 우리 손자의 삶에 게임은 지금의 어린 내딸 지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스마트폰과 같은 기계의 형태로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혹시 VR이 아닐까요? "엄청 구려 보이는데 이름은 스마트네" 저는 우리 손자가 사용하는 장비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의 기능은 지금 제가 사용하는 스마트폰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기술로써 지금보다 더 신속하고 정확하고 고급화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 여기! 옛날 유튜브 보니까 저런 거 들고 게임하더라고 그래서 물어본 거" 우리 손자는 스스로는 인지 하지 못하지만 플랫폼을 이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오늘날의 이름의 유튜브가 아니라도 말입니다. 이 (아이가 부르는) 유튜브의 세상에서는 역사상에서 디지털로 제작되었거나 디지털화된 자료들은 모두 소유(아카이빙)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이는 과거의 자료에 접근해서 도티의 영상을 발견하고 거기서 신기한 것(스마트폰)을 본 후 ('적응'이라는 개념과 달리) 이해를 위해서 엄마인 지아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혼났어?" 아이는 영상을 많이 보는 것 때문에 혼이 났다고 설명하고 있는 엄마를 짐짓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가정교사도, 교육을 위한 교보재로 영상을 문서보다 더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세계지리 시간에 아이들은 학교 책상 옆에 비치된 HMD 장비를 쓰고 가상의 로마로 갈지도 모릅니다.
"음... 그럼 뭘 보는 건데?" 아이는 아마도 끝까지 '보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 손자의 질문에 대한 우리 지아의 대답은 그 어린아이를 아마도 이해를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란 우리가 모르는 것이고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를 소극적으로 변하게 하고, 그 소극에 대해서 서슴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했던 것은 보호라는 이름이었으며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사랑에 기반했지만, 그것이 꼭 옳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TV는 바보상자라 많이 보면 바보가 된다는 것, 스마트폰을 보면 중독자가 된다는 것, VR을 보면 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 못해서 결국 미치게 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헐! 음성 버튼을 눌러서 검색을 하는 뭐 그런 거야? 안드로이드(AI)가 없었어?" 인터렉티브란 지금보다 훨씬 심화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대화에서의 아이는 지금 기술과 나(자아)를 분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사는 세상에서의 AI와의 인터렉티브는 사람과의 인터렉티브와 거의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 지아는 제 손자의 구몬 숙제를 안드로이드에게 맡길 것 같습니다. 손자는 구몬을 풀다가 지루해지면 안드로이드의 팔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하다가 엄마에게 걸려서 혼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마도 지아는 옆에 앉아서 손자가 구몬을 끝낼 때까지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아내가 지아에게 하는 것보다 물리적으로는 훨씬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가 있으니까요. 또한 우리 지아는 구몬이 끝나면 핸드폰을 달라고 하지만, 손자는 그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에게 말만 하면 원하는 것은 다 보여줄 테니까요.
by erdc.kr
구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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