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기 바빴던 과거의 사람들 중 일부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무형)을 위해 내 재화를 사용하는, 즉 그저 사라지는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차라리 그 돈으로 호떡을 사 먹는 게 남는 장사라고 이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을 사라지는 돈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무형임에는 다를 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가치관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구조는 현재에도 그대로 대입할 수 있습니다. 게임 아이템을 사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에 대해서 여전히 무형을 위해 내 재화를 낭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사달라고 하면 차라리 마트에 가서 실물 장난감을 사라고 종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며 아이들을 위해 결제해줍니다. 이러함은 미래로 나아갈수록 심화되고 강도도 높아집니다.
이유는 무형이라고 말하는 그 가치가 내 삶에 영향을 얼마나 주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것을 자신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과, 최근에 개봉한 마블의 새 어벤저스 시리즈 영화에서와 같이 하루 종일 스포일링을 피하려고 SNS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영향에 대한 강도는 다 다릅니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영향은 소비 자체와 소비 패턴에 영향을 준다. 마블의 영화를 통해서 마블을 좋아하는 사람이 마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아이에게 선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무형이 유형을 소비하도록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레디플레이어원'을 보면 가상의 현실에서 더 짜릿한 감각을 느끼기 위해 비싼 실물 슈트를 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한 의미에서 이 묘사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그런데 이 가치관이라는 것은 멈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합니다. 어릴 때는 많이 좋아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이전처럼 좋아하지는 않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슬램덩크의 거의 모든 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만화책을 좋아했던 때도 있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식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음식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서양 음식이 좋을 때도 있고 한국 음식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또 같은 값이면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시키던 시절이 있었다면 더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채소가 많이 들어가는 음식을 시키는 시기가 올 수도 있습니다. 요인들은 다양합니다. 내 건강 때문일 수도 있고, 예전에는 몰랐는데 먹어보니 한국 음식이 또는 채소가 더 맛있다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한번 달라지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결국 둘 다 현재는 만화책을 좋아했던 것이 소멸되었고, 고기를 좋아했던 것이 소멸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인 '좋아한다' 또는 '싫어한다'와 같은 기호의 개념이 아닙니다. '아직도 그리 하거나', '더 이상 그리하지 않거나'와 같은 개념입니다. 결국 이러한 의미에서 가치관이 변한다는 것은 하나의 가치가 생성되었다가 소비되고 소멸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치가 생성되었다가 소비되고 소멸되는 이 이해를 우리는 콘텐츠 주기(또는 라이프사이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콘텐츠는 가치에서부터 발현되며,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는 가치가 없는 콘텐츠를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치가 없다면 설령 만들어도 사실상 만든 것이 아닙니다. 즉 말 그대로 처음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의 시간은 모든 시간대에서 동일하다고 가정할 때, 가치가 생성되는 것은 필요에 의해 어느 시점에 발현이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소멸된다는 것도 어느 시점에 발현되며, 일반적으로는 대체할 무언가가 등장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같은 시간 대에서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합니다. 학술적으로는 기회비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실 이는 지극히 인간학(*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마차를 타고 다니다가 자동차가 나오면 마차와 자동차가 잠시 공존하다가 결국 마차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완벽히 대체하면 없어지고 일부를 대체하면 공존합니다. 배를 타고 다니다가 비행기가 나오면 배를 통해서 이동하던 일부 승객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때그때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에도 그렇지만 이러한 예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대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술의 발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돌도끼를 대체하는 것은 청동 도끼이고 청동 도끼를 대체하는 것은 철 도끼입니다. 철도끼를 쓰던 사람은 철도끼가 없으면 모를까 돌도끼를 쓰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산업에서는 어떻게 이해될까요? 전파를 통해서 콘텐츠를 TV로 받아 소비하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스트리밍을 통해서 현대 디지털 디바이스로 소비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TV도 본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실존적이 아닌 환경적으로) 전통적 개념의 TV가 아예 없는 시대에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마치 당신이 유선 전화의 다이얼을 단 한 번도 돌려 본 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기술이 대체하는 것이 아닌데도 가치가 소멸되기도 합니다.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들은 게임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면 구입한 게임 아이템은 가치가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혹시 몰라 핸드폰에 그 게임 애플리케이션을 당분간 놔둘지 모르지만 어느 날 한번 결심하게 되면 미련 없이 지워버립니다. 이처럼 지루해지는 것과 같이 재미가 없어져도 가치는 소멸합니다. 이는 꼭 디지털 콘텐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물 장난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그 장난감을 더 이상 가지고 놀고 싶지 않으면 그저 집 한 구석에 박혀있는 짐이 되어버립니다. 결론적으로 이 소멸 근거 역시 전(모든) 시대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우리는 실물 장난감에 있어서는 아이가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장난감의 가치가 없어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장난감의 가치를 내 개인이 다 활용한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소멸과 완전 소비는 다른 개념일까요? 즉 이는 이를테면 '나에게는 가치가 없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게임 아이템은 대부분 게임 시스템상 구조적으로 전이를 막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물 장난감은 나의 노력에 의해서 나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충분히 언제든 가치의 전이가 가능하다는 전재하에,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과연 오직 이 이유만으로 실물 장난감은 가치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하고 게임 아이템은 가치가 없어진 걸로 이해하는 걸까요?
일단 게임을 하지 않는 것과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 것은 상태적 측면에서는 사실 같은 개념입니다. 그 이름이 소멸이든 소비든 둘 다 '안 한다'는 개념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결국 게임 아이템을 위시한 모든 종류의 디지털 콘텐츠는 실물 콘텐츠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유형의 물건과 무형과의 가치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일단은 저장의 이슈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콘텐츠를 저장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현재 실물을 저장하는 것처럼 명확하게 활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기 위해 사용했던 다양한 장식물들을 비닐봉지에 집어넣고 묶어 창고에 보관하는 것은 내년도 이맘때 사용하겠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디지털 콘텐츠를 보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일까요?
가치 중심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예를 들어 사진은 출력을 해서 실물 앨범에 보관하는 것이 용의 하며 필요시 더 잘 찾아보고 또 한 번이라도 더 보게 된다는 논리를 지닌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누군가가 대체 요즘 세상에 클라우드에 저장해서 핸드폰으로 보지 누가 실물 앨범을 집에 두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아마도 이 영역은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도 아직 기술이 진 일보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말해야 옳은 것일 수 있습니다.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하던 시대의 자동차는 지금의 자동차와는 기술력을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마차와 자동차는 서로 가성비라는 이름으로 충분히 가치 대결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자동차와 마차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의 운치'라면 모를까 가성비라는 이름으로는 도저히 대결을 할 수 없습니다.
'일단은'이라고 한 이유는 미래의 어느 날 모든 사람이 유형과 거의 구분이 불가능한 수준의 자신만의 디지털 아카이브를 소유하게 되면 이 경계는 무너질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디바이스에 도대체 얼마만큼 데이터를 물리적으로 저장할 수 있어야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인 형태가 완성이 될지 현재는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미래는 싫든 좋든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어쩌면 가상현실이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시기가 오면 이러한 논쟁은 무의미하게 변할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누구도 자동차가 좋으냐 마차가 좋으냐 따위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동일합니다. 이처럼 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반 강제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 보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콘텐츠의 가치에서 소멸이냐 완전 소비냐를 가르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이지 실제로는 거의 아무런 차이는 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이성적이라고 판단됩니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다고 기술(*또는 과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 콘텐츠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인간에 대한 높은 수준의 형이상학적인 이해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은 무수히 많은 요인에 영향을 받지, 하나의 요인에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이는 우리는 요인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가치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인적 측면에서 이해를 하기보다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 맞으며 그래야 분석도 가능하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면 가치관이라는 것은 (*기술이 포함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수동적으로 받아야 되는 것과 능동적으로 결정하는 것의 충돌로 이루어지며, 그 충돌에서 탄생하는 필요를 생성하는 것을 콘텐츠의 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정도가 될 듯합니다.
디지털 콘텐츠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콘텐츠에 대한 가치관의 속성을 이와 같이 이해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디지털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이해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e스포츠는 디지털 콘텐츠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것은 같습니다. 이제부터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이해하는 과정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염보성과 송병구가 진지하게 게임하는 것을 보고 싶은 한 시청자가 3판 2선 승제에 이기는 사람에게 별풍선 1만 개(가치 약 110만 원) 주겠다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곧바로 경기가 진행되고 승패가 나뉘고 누군가가 1만 개의 상금을 가져가게 됩니다. 이는 최근의 이스포츠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는 일반적으로 그림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이 예가 가장 전형적으로 e스포츠라는 디지털 콘텐츠가 생성되는 구조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e스포츠라는 디지털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누군가와 누군가가 디지털 세상에서 대결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 때 그것을 성사시켜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보다 더 단순히 설명하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근거가 곧 가치이며, 그 가치의 발현이 이러한 형태를 가지는 e스포츠이기에 이 e스포츠가 디지털 콘텐츠이면서 e스포츠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개념인) 디지털 콘텐츠가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정의를 새로 할 수 있게 됩니다. 한국외국어대 박성희 교수는 (*이를 테면) e스포츠는 온라인을 매개로 하는 스포츠라고 정의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게임을 도구로, 온라인을 매개로 하는 것을 e스포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을 매개로 한다는 의미에는 게임을 도구로 한다는 아이디어가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e스포츠에 대한 정의를 '사람이 게임을 도구로 경기를 하는 것'이라고 해왔지만, 온라인을 매개로 한다는 것은 여기에 기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으나 결과적으로는) 콘텐츠가 생성되는 방식까지 포괄하는 정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성희 교수가 언급한 e스포츠에 대한 정의를 바탕으로 e스포츠 콘텐츠가 생성되는 방식에 대한 풀이 재 정의를 하면 (*이를 테면) e스포츠는 온라인을 매개로 하여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발현하는 스포츠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정의는 모든 콘텐츠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콘텐츠가 발현되는 방식이 같으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염보성과 송병구가 인터넷 스트리밍 세계에서 게임을 하는 것과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은 그러한 의미로 같은 e스포츠 콘텐츠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프리미어리그와 동네 축구는 같은 축구지만 가치가 같은 것은 아닌 것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가 다른 것일까요? 그것은 결과론적으로는 소비되는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염보성과 송병구가 인터넷 스트리밍의 세계에서 단순히 한번 게임 경기를 하는 것과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은 같은 이스포츠라 부를 수 있지만 같은 가치를 지니는 디지털 콘텐츠는 아니므로 정의상은 같지만 실존적으로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냉정하게 보면 해당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선수들의 노력과 별개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e스포츠를 하나의 산업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관심 있는 게임을 누가 가장 잘하는 가에 대해서 늘 궁금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네 게임 대회에서 지금의 형태까지 성장을 할 수 있게 해 준 이 원동력과는 다르게 (*구현 방식과 별개로) 그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는 결과론적으로 디지털 콘텐츠가 생성되는 방식만 알아서는 안되며 이 콘텐츠가 소비되는 방식도 알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에 대해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우리는 왜 규모가 다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 누가 왜 그 가치를 결정하는가를 분석하여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디지털 콘텐츠가 왜 그 규모로 소비되는지를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결국 우리가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의 가장 본질적인 증거이게 됩니다.
디지털 콘텐츠란 어떤 콘텐츠가 디지털로 구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것을 소비하는 방식도 디지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실존적 측면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이를 테면 "왕자의 게임이라는 드라마가 있어? 그렇다면 가져와봐 내가 손으로 만져보게", 이러한 질문은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영 이상해 보입니다. 그러나 15세기 사람들을 현시대에 데려와 디지털 디바이스를 처음 접하게 한 후 드라마 왕자의 게임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마도 어설프게 자신들의 시대의 복장을 하고 언어를 말하는 사람 인형이 작은 상자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과거에는 없었던) 0과 1로 이루어진 어떤 실존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그 실존이 존재하지 않는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것을 익숙하게 소비하지만 아무도 실제로 손으로 잡아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하며,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디지털 콘텐츠에 모두 적용됩니다. 글, 그림, 영상 할 것 없이 디지털 디바이스로 소비하는 모든 콘텐츠를 그래서 디지털 콘텐츠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러한 특징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를 원활히 이해하기 위해 보충 설명을 하면) 체험은 지식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며 지식이 습득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체험을 했는가 하지 못했는가로 지식을 체득했는가 안 했는가로 나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니는) 체험이라는 것은 즉각적으로 진행되고 대단히 개인적인 교훈(*지식)을 남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핵심) 이 체험을 공유한 사람들에게는 그 과정을 통해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그 공감대는 개개인으로부터 다양한 표현 형태(*글, 그림, 플래시 등)로 창조되어 그 사람들의 개개인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로 현시대를 정의하면 공감대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들은 동시대적으로(*simultaneously)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체험하고 지식으로 전환되어 공감하며, 이러한 현실과 디지털 세계를 접목시키는 과정을 매우 익숙하게 무한 반복하면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따라서 디지털 콘텐츠란 (*그리하기에) 결국 소비자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지털 콘텐츠의 세상에서 소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그것은 디지털 콘텐츠의 라이프 사이클이 한 회 소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레디 플레이어 원' 이 상영되고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영화에 대하여 일종의 소비라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는 이 디지털 콘텐츠가 그 사람의 개인 입장에서 한번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반박의 논리로 시즌 10까지 있는 프렌즈를 두 번 세 번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볼 때와 그 이후에 보는 것은 콘텐츠의 소비 목적이 다르므로 여하튼 사이클이 한번 돈 것임에는 변화가 없어 결론은 동일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그 기술로 통해서 누군가가 던져주는 어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디지털 콘텐츠의 생성과 소비는 우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가 궁금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잠시 디지털 콘텐츠가 생성되는 방식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웹툰과 같은 이미지는 태블릿에서, 영화와 같은 영상은 디지털카메라에서 탄생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렇듯 기술적으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태블릿과 카메라를 준다고 해서 누구나 웹툰이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본이 만든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대답은 아마도 30년 전이었다면 대체로 맞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동아출판사의 보물섬(*주간 만화 잡지)은 태블릿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지만 개인이 만들어 퍼블리싱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개인이 그림과 글을 써도 소비되지 못하는 콘텐츠는 결국 콘텐츠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현재도 플랫폼이라는 것은 존재하며, 플랫폼이 일종의 당시 자본의 역할을 일부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화를 그려서 전국적으로 서비스를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현재와 같이 접근성이 심하게 높은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디지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면 1인 미디어(크리에이터)의 존재가 현재 자본을 위협하게 된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닙니다. 수백억 원을 투자한 전통 미디어의 드라마 상영시간에 그것을 보지 않고 (*단지 몇백 원의 전기세만 내고) 게임 리뷰 영상을 올린 유투버의 영상을 보고 있다면 가히 위협이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전통 미디어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은 화가 날 수 있습니다. "너라는 사람이 지금 (*내가 만든) 500억짜리 사극을 정규 방송 시간에 봐줘야 광고가 그 규모로 계속 붙고, 그래야 다시 500억짜리 사극을 찍을 수 있는데, 너라는 님은 지금 도티 크리에이터님의 영상을 보고 있으니 오죽 답답하지 않으랴." 그러나 사진이 나오면 회화가 죽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 초대형 드라마를 공짜로 볼 수 있게 되면 영화 산업이 죽을 거라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결과적으로 헛소리가 된 것처럼, 1인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콘텐츠를 쏟아내도 KBS가 문 닫을 것을 예측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사람이 소유한 시간이라는 것은 한정적임에도 불구하고도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 이유는 첫째는 누구나 변화를 강요받지만 누군가는 변화하기 때문이고, 둘째 우리의 디지털 콘텐츠 접근성과 소비력과 자본은 현재 나오는 모든 콘텐츠를 소비하고도 남을 정도로 상회하기 때문이라고 답변드릴 수 있습니다.
정리를 하자면 결국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동시대적으로(simultaneously) 라이브 및 VOD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전체론적으로(Holistic) 설명하면 넷플릭스가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과, 아프리카 TV나 트위치 TV가 점유율을 유지하는 것 유튜브에 영상이 범람하는 것, 앱스토어에 애플리케이션이 그토록 많은 이유, 하룻밤 사이에 쏟아지는 뉴스 기사, 즉 이 모든 이유는 전부 우리가 동시대적으로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그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추가로 이 동시대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것은 생산과 동시에 소비와 재소비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재 소비는 콘텐츠를 소비 후 콘텐츠에 연관되어 발생되는 2차 콘텐츠를 연이어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는 상호 영향이기 때문에 그 콘텐츠의 가치고 소멸될 때까지 무한 반복됩니다.
영화를 예를 들면 예전에는 미국 개봉 후 1달 후에 국내 개봉을 하는 경우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화를 봐도 영화를 봤다는 감동을 어디다 나눌 데도 별로 없었습니다. 즉 생산 후에 소비가 일어났고, 소비가 일어난 이후에도 재 소비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OST나 포스터를 사는 것 정도 외로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동시 개봉이라는 단어 자체도 어색합니다. 복합 몰에서는 영화를 보고 즉시 스토어에서 관련 실물 상품도 구매할 수 있고, 영화 후기도 남길 수 있으며, 누군가가 남긴 SNS 글에 댓글을 달 수도 있습니다. 후기 영상을 편집해서 올리면 퍼가기고 하고, 더 이상 남는 게 없을 때까지 계속 소비 거리를 찾아 소비합니다.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의 카톡 공개 채팅 방에 들어가 짤방을 공유하는 것은 그러한 측면에서 매우 전형적인 현대인의 콘텐츠 소비의 예입니다.
이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보다 적극적으로 구분하고 소비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해 여름에 KBS에서 이 드라마를 방영하기로 결정하면 나는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밖에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도 더 이상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몇 주 전에 방영한 한국 프로그램을 보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 자체도 많아졌지만, 그보다 더 인터넷 세상에 접근하면 심지어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를 예측하는 (*심지어 일부 강요하는) AI를 만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전통 업계의 사람들은 무엇이 어디서 제작될지도 예측할 수 없는 적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 적은 때로는 모기일 수도 있지만, 유성의 충돌과 같은 전반 생태 환경의 변화 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200개나 되는 채널을 몇십 번을 돌려도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가 없어서 TV를 끄는 날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반드시 좋아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둘의 차이점은 50% 확률이나 100%의 확률이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분석하는 것이냐 미래를 예측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지금 현재를 분석하는 것은 좋아할 만한 콘텐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현재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즉 그래서 우리는 50%의 확률을 100%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유행하는 게임을 이제 개발하기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할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은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완성하기 위해서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의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디어는 현재 상황이나 분위기와 같은 환경을 분석하는 곳에서 나오지만, 아이디어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공감 영역을 찾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이 공감 영역을 무엇이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는 각 산업과 콘텐츠마다 다 다르지만 보통은 뚜렷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고 대체적으로 기술의 발달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시대이건 사회 문화 속 사람은 늘 동일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랜덤 채팅을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천지입니다. 과거의 인간도 불효자는 울며, 지금의 인간도 불효자는 웁니다. 세상은 변해도 사람은 동일합니다. 더욱이, 인간은 인간으로 이해해야지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요인에 인간을 얶매는 오류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결국 디지털 콘텐츠라는 것은 인간이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인간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효과적으로 풀어 줄 수 있는 도구가 하나 생긴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콘텐츠를 생산하거나 유통하거나 어떠한 위치라도 그 판단 기준에 명확히 서 있어야 합니다.
결론을 내리면서 종합하면 디지털 콘텐츠의 구현과 소비 방식에 대한 결론은 이 도구와 그 사용법에 패턴이 생기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곧 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생산자라 소비하는 자를 소비자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는 크리에이터도 마찬가지고 e스포츠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디지털 콘텐츠, 아니 콘텐츠의 세상에서 전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패턴이 보다 정교해지고 시스템화 되면 경쟁 콘텐츠 간 상호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고, 예를 들면 그것으로 인해 결과론적으로 송병구와 염보성이 아프리카 TV에서 한번 경기를 가지는 것과 월드 챔피언쉽이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패턴을 정의할 수 있게 되면 그것에 가치와 상호 사회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을 문화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e스포츠는 문화인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e스포츠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계관, 이념, 가치관 등을 살펴보면서 (*콘텐츠를 포함한) 특별히 디지털 콘텐츠 산업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배경이 되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함께 알아보았습니다. e스포츠라는 것을 우리가 문화로 이해하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접근하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고, 그 근거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려 드리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디지털 콘텐츠의 세대적 이해, 또 플랫폼과의 관계, 파티별(*1st party to 3rd party) 구분 등등 보다 실질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다시금 돌아 생각해 보면 독자님에 따라 이해하기가 아주 쉽지는 않은 내용인 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강의로 여러분을 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아무쪼록 읽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by erd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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