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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콘텐츠와 소비의 관계

 

사람들은 시대가 어찌 변화되었건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확인하는 것과 내가 원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콘텐츠를 전부 그리고 효과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 인터넷 세상으로 매일 같이 파고듭니다. 그리고 그들은 필요 콘텐츠에 대한 목적(*소비)이 해소된다고 해서 소비 행위를 거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적한 콘텐츠의 소비가 종료되면 다른 콘텐츠를 찾고 이 패턴은 계속적으로 반복되어 소비를 가능한 한 최대로 늘려 나갑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확인하고 싶은 콘텐츠가 있어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한 후 해당 콘텐츠를 찾아들어가 그 콘텐츠의 소비를 종료했다고 하더라도, 이 이후에도 포털은 사방으로 내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들을 계속적으로 여기저기 풀어놓아,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 작업을 끈길지게 진행합니다. 이는 21세기의 모든 플랫폼에서 매일 같이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목적 기사 하단에 다양한 관련 기사들을 펼쳐 놓아 추가로 읽게 만든다던가, 실시간 댓글에 녹아 있는 사람의 심리와 반응을 손쉽게 확인하게 만든다던가, 관련된 콘텐츠를 보다 심층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칼럼을 찾게끔 유도합니다. 그것이 SNS든 어디든, 심지어 어디서 접속해도 이 방향성은 전부 매한 가지입니다. 한 우스운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 영상 아래로 웃긴 동영상들만 죄다 모아 놓아서, 다음 동영상을 소비하게 하고, 그 아래 또 다음 동영상을 소비하게 합니다.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어디서 어떤 그룹 활동을 하는지를 알려주어 나로 하여금 해당 커뮤니티 가입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소비자는 알지 못했던 추가 콘텐츠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 알게 된 콘텐츠가 나중에는 내가 확인하고 싶은 콘텐츠가 되어서 다시 플랫폼에 개인을 접속시키게 만듭니다. 이러한 형태가 무한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행위를 하기 위해서 거치게 되는 모든 장소(*즉, 사람이 어딘가로 가기 위해서 사이버 세상 속에 서 있는 곳)들을 전부 일종의 디지털 플랫폼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든, 못하고 거치는 것이든 관계없이 현재 무언가 나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곳은 그래서 다 가치를 지니게 된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에서 시작해서 넷플릭스로 끝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페이스북 친구 누군가가 1) 당신이 몰랐던 한 외화에 대한 긍정적인 평을 남기고, 2) 그 게시글에 댓글을 단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니, 3) 그 외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4) 그래서 넷플릭스에 가서 그 외화를 소비하게 되었다면, 이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 패턴은 현대인들에게 전혀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만화도, 게임도, 음악도, 모든 콘텐츠에 그대로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이를 토대로 디지털 콘텐츠의 소비에 대해서 보다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우리는 도입 콘텐츠를 소비한 후, 그다음 콘텐츠를 소비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단계적으로 최종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으로 그 행위를 끝냅니다. 페이스북에 어떤 외화에 대한 평가를 누군가가 작성함으로써 하나의 콘텐츠를 완성했다면 그 콘텐츠는 자동적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게 됩니다. 그 형태는 댓글이며 결국 이는 댓글이라는 추가 콘텐츠가 생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까지 콘텐츠를 소비한 나는 그 외화를 최종적으로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 포털에서 검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포털에서 제공하는 일종의 '그 외화 소비하는 방법'이라는 콘텐츠를 소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넷플릭스에 와서 그 외화를 소비했다면, 최종 소비 행위는 완료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소비자는 스스로 인지하지는 않지만 넷플릭스와 페이스북을 오픈하는 이유가 다릅니다. 하나는 콘텐츠 자체의 소비를 돕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른 하나는 콘텐츠에 대한 사회의 반응을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은 플랫폼으로써의 동일한 사업적 특징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형태 측면은 서로 다릅니다. 페이스북은 장편 외화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넷플릭스는 페이스북과 같이 적극적인 형태의 커뮤니티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넷플릭스는 소비가 최종 목적인 콘텐츠를 구입 또는 자체 제작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페이스북은 사회의 반응을 잘 보여주기 위한 역할을 하는 콘텐츠를 불러오는 기술과, 나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시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플랫폼들은 그 각각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기존의 콘텐츠 접근 공식(*넷플릭스는 케이블, 페이스북은 포털)을 비틀면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약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가 콘텐츠에 보다 빠르고 쉽고 정확하게 우리를 접근시켜주게 되면, 우리는 굳이 현재의 형태의 서비스를 이용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비하는 과정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이 있기 전에도 우리는 콘텐츠를 어딘가에서 소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페이스북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페이스북에서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이것을 저는 '비튼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비틀게 되면 콘텐츠에 대한 접근과 소비 공식이 변화가 있게 되어, 소비자는 이전까지 활발하게 방문했던 서비스를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정리하면 디지털 콘텐츠 산업에서 플랫폼(*서비스)이란 필요에 따라 '비틈'이 출현하고 필요가 없어지만 사라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하면, 콘텐츠 서비스 제공 메커니즘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비틈'의 가능성은 급격히 낮아지게 됩니다. 이를 테면 단지 음원을 다운로드하는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있다면 이것은 비교적 쉽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플은 아이튠즈를 통해서 외부에서 다운로드한 음원을 아이폰 기기에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권한이 처음부터 없던 것입이다. (*이 부분은 아래에서 추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 추가, 팔로우 등이 다년간 복잡하게 얽혀 있는 페이스북을 떠나서 새로운 플랫폼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상식적으로 그걸 감수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가 페이스북 사용자에게, 팔로우도 필요 없고, 페이스북에서 올라오는 모든 콘텐츠보다 더 나에게 맞춤 정보를 전달하고, 내가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더 효과적으로 실현시켜 줘야 합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서비스의 근원이 되는 디지털 콘텐츠 시장이란 어느 플랫폼 시대 인가와 관계없이 마치 질서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배틀그라운드와 같이 게임성이 높은 게임을 만들면 어떤 플랫폼 서비스를 타고서라도 내게로 올 수 있으니 무엇이든 질 높은 콘텐츠만 만들기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불법으로 음원을 받는 것만 차단하면 어디서든 내 노래를 받을 사람은 다운로드할 거라는 개념과 같습니다. 퍼블리셔라고 불리는 플랫폼들이 앞을 다투어 다가와 내 콘텐츠를 서비스하고자 하는 욕심을 드러낼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로 일부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몸을 담그고 일하는 사업장에서는 이러한 구조가 적용받지 못합니다. 매일 밤을 새워 기존에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었다고 해도 내 콘텐츠는 배틀그라운드가 되지 못합니다. 배틀그라운드의 예)가 이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데 왜 일까요? 내 콘텐츠는 배틀그라운드만큼 질이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라트 아난드 교수의 생각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라트 아난드 교수는 그의 저서 콘텐츠 트랩(The Contents Trap)에서 콘텐츠 산업의 핵심을 콘텐츠의 가치에 있지 않다고 언급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콘텐츠,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제가 이전부터 일관적으로 주장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 근거가 무엇일까요? 현재 대부분의 e스포츠 제작사들은 지금도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며, 그것이 경쟁력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기 힘듭니다. e스포츠 경기 콘텐츠에서, 결국 도구(게임)의 가치는 종목사에게, 핵심 퍼포먼스는 선수에게 달려 있습니다. 심지어 중계의 영역도 개인(방송인)의 역량에 대부분 달려 있습니다. 결국 방송사는 콘텐츠 제작이라는 사업에 대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오프닝 같은 것 외로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그것은 e스포츠만의 특수성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디지털 콘텐츠 산업 전반에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구조적 한계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과 그 필요에 따른 실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난드 교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콘텐츠를 소비하기 위한 도구를 서비스하는 산업'이 결과적으로 콘텐츠 산업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기에 유리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애플은 아이튠즈를 서비스하면서 쉽고 간편하고 저렴한 가격인 99센트에 음원을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서비스했습니다. 이 혁신적인 개념으로 인해 애플의 제품을 사용하는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애플은 음원 서비스로 돈을 번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아이폰을 많이 팔게 되어 수익이 증가한 것입니다. 아난드 교수는 산업의 성장에 따른 구조상 콘텐츠(음원)를 만드는 제작자는 여기에 매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합니다. 아난드 교수는 (*결국 도구를 제작하는 사업자인) 애플이 보완제 (*아이튠즈)를 시장에 성공적으로 론칭시켰기 때문에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애플이 만든 것은 단순한 보완제 (*아이폰을 사용하는 것을 편리하게 돕는)가 아니라 아이튠즈가 플랫폼 (*사람들이 머무는)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보완제라는 단어와 플랫폼이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여기서의 역할은 비슷합니다. 결국 이 두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닌 필요와 실현이라는 이름의 연결입니다.   

그 증거로 '애플은 결국 사람을 보고 있었다.'라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초기의 아이폰은 원천적으로 외부에서 다운로드한 음원을 기기에 삽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합니다. 이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소리바다에서 받든, 멜론에서 받든, 네이버에서 받든, 심지어 토렌트에서 음원을 다운 받든, 더 심지어 유튜브 뮤직비디오에서 음원만 내려받든 아이폰에 삽입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애플은 콘텐츠 제작자가 확보해야 하는 99센트를 지키지 않습니다. 애플은 왜 이 보완제를 콘텐츠 제작자를 위한 방식으로 지키기를 포기했을까요? 그것은 보완제로써의 역할이 다해 서가 아니라 경쟁 플랫폼인 구글이 이렇게 서비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애플의 폐쇄 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지만 정확히 폐쇄 정책이 의미하는 바를 모릅니다. 핵심은 수익인데, 그 중심에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폰에 몰려온 이유가 99센트였는데, 결국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도 99센트라면 애플은 아이폰 판매자로 써가 아닌 플랫폼 사업자로서 콘텐츠 제작자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전 세계는 '연결'을 지키기 위한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우리 산업의 가치는 그 콘텐츠가 더 높은 질적 가치를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콘텐츠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무엇을 연결시키고 있는가'입니다. 이 사실을 e스포츠에 비춰보면 많은 사람들이 좌절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특정 대회의 대다수의 소비자가 (*경기 장소가 집이든, PC방이든, 경기장이든 어디든, 오프닝이 있든 없든, 기타 선수 경기 기록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든 말든) 그런 건 다 별로 필요 없고, 선수들의 경기와 중계진의 설명만 아무 문제없이 방송으로 내 보내주면 된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것 외로 더 이상 콘텐츠의 질을 높일 이유가 없어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콘텐츠의 질을 높인다고 해도 그것이 아무런 경쟁력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오히려 500명 보는 방송이나 5만 명 보는 방송이나 제작비가 동일하게 측정되어야 할 기타 이유(*높은 고정비 등)가 있는 것이 경쟁력에 방해만 되는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에, 적절히 부합하는 시나리오와 촬영 계획이 있다면, 그 필요에 충족시키는 실행이 필요한 것이지, 절대로 그 이상의 콘텐츠의 질을 높이는 과정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게 됩니다. 쉽게 말해 남이섬에서 5명만 있으면 찍을 수 있는 영상을 굳이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50명이 가서 찍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그 영화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즉 필요) 서로 간에 <연결>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이라고 설명하는 아난드 교수가 그러한 의미에서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는 만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음악에서도, 어디서든 그 예를 더 들어 보라고 말해도 하루 종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스포츠만의 특수성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연히 예외가 없는 것도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더 나은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배틀그라운드와 같은 게임이 나오면 그 높은 가치를 인정받으며 우리는 이를 대단히 중요한 업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서술을 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배틀그라운드와 같은 게임을 만들어 내는 것' 즉, 그런 목적의 콘텐츠를 창조하는 것만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그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금 주어진 일을 열심히만 하면 먹고살 수 있어야 좋은 세상이라는 사회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콘텐츠 수준은 필요에 따라 결정되며, 그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도록 소비자를 연결시키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 세상에서의 중요한 가치의 실현이라는 것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애플의 아이튠즈의 예가 그리했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를 최종적으로 연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과정을 확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선행해야 하는 과정이 이념(Ideology) 또는 세계관(*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념이란 간단히 말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바람직한 (*이상적인) 세상'이고, 세계관이란 비슷한 이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설명하는 특징의 나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에는 정치, 역사, 교육, 문화, 환경, 종교와 같은 요소가 숨어 있으며, 특징들은 역할이 각각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이나 태도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각각의 특징을 살펴본 후에 총체적 관점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마블의 영화는 미국인에게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지만 중동 지역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거북한 소재를 다루는 것일 수 있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한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이념의 시대에서 실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아마도 이제는 공산주의 국가든 누구든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이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듯합니다. 물론 당시 시대를 고려해 보면 그러한 사용이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 이념이라는 단어를 실용의 반대어로 쓰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적 관점에서 '이념'이란 과거와 같이 국한된 개념이라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바람직하다고 믿는 것'이라 정의하는 것이기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최근의 보이는 사회 현상에서 이 이념이라는 것의 사용은 '집단의 이익'에 무엇보다도 밀접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오늘날은 오히려 이 이념이 가장 실용의 영역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이슈에 대해서 그 이슈를 접한 사람은 모두 각자의 생각에 근거한 논리를 가지게 됩니다. 이는 그 문제에 대해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을 각자가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곧 현대적인 의미의 이념입니다. 이 이념은 단순히 개인의 생각에서 머무르지 않고 어딘가에 가서 확인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생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함과 동시에 행위자 간 사고의 공유가 일어나고 그 결과로 하나의 거대한 공감의 영역이 창조됩니다. 그 공유되는 사고들에서 몇 가지 특징을 찾아내서 묶게 되면 이것이 그들의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이념과 동일하게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 그저 머물러 있지 않고 즉시 외부로 나와서 단체로 자신들을 증명하며 반대 세계관이 존재하게 되는 경우 반드시 충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충돌은 이슈의 중요도에 따라서 엄청난 파급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여기서 펜스 룰은 아주 좋은 예)입니다.  

이 룰의 해석에 대해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씁니다. 나와 같은 세계관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댓글이든 이미지든, 영상이든 어떠한 형식이든 나보다 내 이념을 더 잘 설명하고 있으면 주저 없이 '좋아요'를 누릅니다. 반대로 내 세계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면 주저 없이 '싫어요'를 누릅니다. '싫어요'가 눌러진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형태로 콘텐츠는 계속 생성되고, 사람들은 생성되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콘텐츠는 과연 어디에서 생성되었나요? 미투라는 이슈에서 생성되었습니다. 미투라는 이슈는 펜스 룰이라는 하부 소재를 등장시켜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공감으로부터) 일종의 세계관을 발현시켰습니다. 이 세계관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계속 콘텐츠를 생성 소비를 반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펜스 룰로 인해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진영(*같은 세계관을 공유)의 논리가 옳다, 아니면 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진영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이슈로든 이처럼 세계관이 충돌하게 되는 경우, 1) 대부분 진영으로 갈리게 되고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 2) 그 콘텐츠의 폭발력은 이슈가 가진 힘에 따라 가희 상상을 불허한다는 것, 3) 우리는 전문가로서 특정 이슈가 어떠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생성되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지 분석해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4) 그래서 현대인에게 이념이란 집단(또는 진영)의 이익과 밀접히 결합되어 있는 매우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독자에게 인지시키고자 노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다양한 의미로 활용되는 표현인 '서버가 터질 것 같다'는 우리에게 지극히 전문가로서 그 표현을 이해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집니다. 이는 이 스포츠도에서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논리를 이해하면 '느그형', '씨강딱' 등등의 단어들이 왜 우리 산업에 등장하게 되고 그 단어가 주는 영향이 무엇인지 전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콘텐츠 산업의 종사자를 넘어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봐도,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폭발력 있는 것은 항상 이 세계관의 충돌이었습니다. 그 표현의 소재가 시든 소설이든 산문이든 회화이든 일기든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충돌은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더 다양화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것도 이슈입니다. 조간신문으로 콘텐츠를 확인했던 사람들은 다음 콘텐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석간을 기다려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할 방법이 별로 없었습니다. 조간 이후에 석간이 되어야 세계관이 한번 더 충돌할 수 있었던 것이고 충돌하는 세계관의 반대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피력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시대가 지나가면서 24시간 뉴스를 제공하는 라디오와 TV가 출현했습니다. 이 뉴스를 제공하는 매체들은 조간과 석간 시대와 다르게 실시간으로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가공해서 내보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 모두가 모든 곳에 항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디어 간 연대에도 한계는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만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누군가가 제공하는 정보에 대해서만 알 수 있었으며 간혹 TV 인터뷰에서 세계관에 충돌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을 시청하게 되면 (*개인으로는) 'XX소리 하고 있다고' TV 브라운관에 소리치는 것 정도가 다였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터넷이 발달되게 되고,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매체가 스스로 그것이 중요하다고 선택하지 못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싶은 정보를 직접 접근해서 얻어내는 형태로 콘텐츠 소비 패턴이 변화되게 되었다는 말이고 이는 '나에게 중요한 정보는 이것이다'라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추가로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관심이 있어할 정보를 스스로 제작해서 직접 운반(Deliver)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실시간으로 전달된 콘텐츠는 사람들에 의해서 소비되고 서로 간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피력하여 콘텐츠가 최종적으로 완전히 소비되어 없어질 때까지 계속 추가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그 방식은 게시글, 댓글, SNS, 이미지, 영상, 플래시 등으로 다양하며, 표현도 나열, 직설, 풍자, 비유, 은유, 호소, 설득 등으로 복잡합니다. 다 각각은 좋은 싫음으로 감정을 표현하여 사회의 시각을 대변할 수 있도록 비춰줍니다. 이는 누군가가 아무리 이 정보가 중요한 정보라고 주장해도 사람들이 관심이 없는 것이라면 아무런 조회수도 댓글도 없는 즉 철저히 외면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력의 입장에서는 그전까지는 정보의 제공 자체를 제어하는 방식으로 매체를 활용하였다면, 이후에는 정보에 대한 관심을 제어하는 쪽으로 활용에 대한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이해할 수 없는 타이밍에 갑자기 밝혀지는 연예계 사건 사고 등이다. 그런데 점점 더 똑똑해지는 소비자들은 이제는 그러한 방식에도 잘 속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교묘히 논점을 흐리는 것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는 개인 간의 성추문에는 그래서 소비자가 배타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그것을 일종의 진영(커뮤니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영은 공유한 이슈의 '뜨거움'에 따라서 규모와 단합의 강도가 결정지어지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상상하는 바와 같이) '일간베스트', '메갈리아', '오늘의 유머' 등 입니다. 매체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예외는 아닙니다.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디스패치 등도 농도는 다르지만 특징은 같습니다. 물론 이는 비교적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뒤늦게 합류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전통 미디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미디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범위도 단지 JTBC의 뉴스룸이나 썰전과 같은 형태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슈퍼스타 K, 알쓸신잡, 신서유기, 효리네 민박, 믿고 보는 김은숙 작가, 흥행의 아이콘 공효진 등등 이들 전부 다 이 논리입니다.  

전형적인 웹상에서의 커뮤니티를 예로 들면 '디시인사이드', '에펨코리아', '엠엘비파크', '파코즈', '루리웹', '플레이웨어즈', '뽐뿌', '인벤', 'pgr21', '나무 위키', '네이트[판]', '맘스홀릭 베이비', '레몬테라스'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진영들도 모두 전부 각각의 이슈로 인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 가능한 설립 이념과 공유하는 세계관도 각각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1) 전세대 혹은 구성원 간의 공감대가 비교적 강하지 않으며, 2) 외부에 대해 왜곡될 정도로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고, 3) 같은 선상에서 항상 대립되는 상대 진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어 사회적 측면에서 일반적인 그룹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관이 충돌할 경우에는 잠재적으로 이 모든 커뮤니티들은 방어적이거나 때로는 심하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이런 특징에는) 누구나가 예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게임을 사회악, 또는 중독이라고 규정하는 움직임이 있다면 인벤과 같은 커뮤니티에서는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게임을 사회악, 또는 중독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은 인벤에서 아예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즉 단순하게 보면 '연결되어 있거나 연결되지 않았거나'이다. 이 진영 논리의 가장 큰 특징은 카리스마를 가지고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리더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식의 전문성, 논리의 확고함, 강인한 정신력, 때로는 진영을 위한 자발적 희생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내부의 구성원들로부터 지지를 얻게 되며 이를 기반으로 그 진영은 그들만의 논리를 대변하고 발전시켜 세계관을 확장해 나갑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논리는 설득력을 가지게 되고 사회적으로는 영향력 행사하기 위한 세력화가 되어갑니다.    

형성된 세계관은 이처럼 같은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을 연결함으로 (필연적으로)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지만, 이는 이 각각의 사람들이 서로 영원히 연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는 아닙니다. 만약 진영의 논리로 인해서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 있다고 해도 외부의 적이 출현하게 되면 이 둘은 언제든 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를 테면 한국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일본은 다시 전쟁 특수를 누릴 수 있다와 같은 의견이 일본에서 부터 한국으로 들려오게 되면, 평소에는 나뉘어 있던 국내 보수와 진보는 즉각 연대하게 됩니다. 이를 반대로 해석해 보면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서도 세부 주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여 서로 소 진영으로 나뉘게 되는 경우도 가능합니다. 한 프로 선수가 인터넷 상에서 인격 모독적인 언행을 벌인 사건으로 인해 그 경중에 따라 제명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사과를 하면 봐줘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이제 e스포츠에 적용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스포츠는 절대로 승부조작을 하면 안 된다.', '매 경기는 대국민 약속이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시작해야 한다.', '만일 늦을 경우 중계진을 통해 사과해야 한다.', '모든 선수는 마우스/키보드/헤드셋 등 장비가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환경에서 공정이 경쟁해야 한다.', '다른 선수들을 비방하거나 비하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 '선수들은 그들의 능력 여하에 따라 적정선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월급은 안주는 행위 같은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연습에는 자율이 있어야 하고 강압은 없어야 한다.', '선수단에서는 차별이 있어어는 안된다.', '선수에게 치근덕 대는 여성 팬은 없어져야 한다.' 등등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만일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이념들을 나열하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e스포츠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페어플레이 정신과 같은 특징들이 무슨 대립이나 갈등이 있을만한 이념이나 세계관과 같은 거창한 단어로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게임과 전혀 관계가 없는 (*즉 우리와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고 심지어 대립되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그깟 게임 대회 아무렇게나 하면 되지, 뭘 그리 따져, 어차피 중독자 놀음인데'라고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게임과 같은 질병을 이스포츠와 같은 형태로 자꾸 미화하니까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우리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들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꼴'이라는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같은 사건을 바라봄에도 이처럼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총생산의 아주 큰 포션을 차지하고 있는 게임 산업을 우리가 죽일 수 없으니, 국가가 나서서 자꾸 e스포츠와 게임을 긍정적인 것으로 몰고 가려는 게 아닌가'라는 음모론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관의 세계에서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우리 e스포츠에 더 높은 이상과 높은 스탠더드를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이 차이는 벌어지고 세계관이 충돌할 때 갈등은 훨씬 심화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내리면 '우리는 콘텐츠와 연결이 되었다'라는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우리는 콘텐츠를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보면 우리는 새 마블 시리즈의 영화를 원한다와 같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콘텐츠와 연결되었다' 함은 단순히 콘텐츠를 보여달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콘텐츠를 보여달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보면 우리가 원하는 콘텐츠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콘텐츠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콘텐츠 형태는 곧 그 이슈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이념을 의미하며, 이것을 공유하는 곳에서 태어나는 커뮤니티들에서 보여주는 특징들을 모으면 그것이 그 이슈에 대한 우리의 세계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디지털 콘텐츠를 이해함에 있어 왜 세계관에 대해서 이토록 오래도록 설명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세계관이 곧 문화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문화란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콘텐츠 소비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관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고 그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으면 그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을 모르니 같은 문화를 공유한다고 말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 드린대로 이 세계관은 항상 대립되는 세계관과 충돌할 여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마치 별 문제없어 보이는 마블의 새 시리즈도 미국과 세계관이 다른 중동 지역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리고 세계관의 충돌로 인해서 생성되는 콘텐츠들로 인해서 소비자 간 연결은 더 심화되게 됩니다. 이렇게 심화된 연결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소스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산업에서 어떠한 필요를 반영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입니다.  

 
by erdc.kr

구마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