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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

제목을 올려놓고 심사숙고 중입니다. 그런데 제가 심사숙고를 하는 이유는 풀어낼 논지가 부족해서는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펼칠까 하는 방법론적인 고민입니다. 저는 E스포츠에 있습니다. 그런데 방법을 고민하는 이유는 게임 리터러시를 풀어내는 데 있어서는 게임 업계와 주장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장이 다른 부분이 있는 이유는 게임이라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E스포츠는 게임 산업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말합니다. 따라서 게임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E스포츠는 게임 문화에 속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E스포츠는 게임 개발 산업 혹은 게임 서비스 사업 등과는 다른 것입니다. 게임 문화 산업이라는 것에 E스포츠가 있다는 의미는 E스포츠는 그 정책적 접근이 게임 산업과 같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정부적 차원에서도 E스포츠는 문화이기에 육성과 같은 단어와 잘 어울리지 않아 같이 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그럼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고 물으신다면 '활성화' 또는 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단어와 함께 사용합니다. 이를 테면 게임 문화 활성화, E스포츠 활성화입니다. 물론 게임 산업도 때에 따라 활성화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논지는 육성과 활성화는 서로 쓰임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게임 이용 규제나, E스포츠에 적합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 등은 전부 E스포츠 문화를 활성화시키는 것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예를 들어) E스포츠를 정부 차원에서 장려하는 정책의 내용의 기사를 접할 때, "그런 거에 관심 가지지 말고 게임 규제나 풀어줘라"라는 댓글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주제를 뜬금없이 한데 묶는 것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실제로 '게임 산업'의 육성을 제약하는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구조적으로는 '게임 문화'를 활성화하는 정책과는 서로 무관합니다. 이를 테면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는 건전한 게임문화 홍보를 위해 '게임 캠프' 사업을 진행합니다. 여기에 만일 "게임 캠프 같은 것에 돈 쓰지 말고 게임 규제나 풀어줘라"라고 누군가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은 지금 게임 문화 혹은 게임 리터러시 사업이 마치 게임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게임 규제 철폐와 같은 것 외로는 기타 모든 것은 전무 무의미하거나 우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게임 캠프의 목적은 명백히 건전 게임 문화를 홍보/교육하고, 그 문화를 활성화하는 데 있습니다. E스포츠는 문화라 위와 접근이 동일합니다. 즉, E스포츠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의 댓글에 누군가가 "게임 산업은 죽어가고 있는데"라고 댓글을 달아도 이는 그래서 전혀 연관성이 없는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를 알기 전에 이처럼 게임 산업과 분리된 게임 문화 자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작업을 선행해야 합니다. 특별히 게임 산업 육성과 E스포츠 활성화는 서로 별개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 둘이 별개인 이유는 게임 문화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게임이라는 상품 자체와 그 경제성 아닌)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경쟁력 있는 상품을 개발 및 서비스하는 것을 정책적으로 지원하여 기간산업을 튼튼히 육성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사회 내 공동체적으로 구성된 국민의 커뮤니티 활동을 원활하게 (*또는 활성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물론 '게임 산업'과 '게임 문화'가 서로 다른 것이라도, 상호 연관성이 있는 내용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섞은 논지를 들었을 때, 우리라 한들 자주 헷갈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밤 10시 이후에 게임을 할 수 없는 "게임 셧다운"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이 게임 셧다운제는 E스포츠가 게임 산업 속해 있기 때문이 근거가 아니라, 게임 셧다운제가 게임 산업과 E스포츠에 같이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E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선수에 한해서는 게임 셧다운제에 적용을 받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게임 문화를 선도(교육/홍보) 하기 위함이지, 게임 산업의 규제인 게임 셧다운제를 유지하자는 것과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다른 규제인 "확률형 아이템 규제" 등은 E스포츠와 아예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게임 문화의 하나인 E스포츠를 활성화한다는 것은 E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법적으로, 정책적으로, 인프라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게임 개발 지원이나 서비스 규제 철폐 등이 있지 않고) 경기장을 건설하고, 대회를 개최하고, 방송 콘텐츠 제작을 지원하고, 실태 조사 및 문화 현상 등을 연구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활성화'를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일전 포스트에서 밝힌 바와 같이 게임 과몰입(*중독)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E스포츠'라는 방식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시점에서 이 혼돈 속에 보석처럼 밝게 빛나는 이 E스포츠라는 것을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려는 시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공동체적으로 게임 과몰입(*중독) 현상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대체 무엇을 이야기해야 되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이들이 (*다른 놀이가 아닌) 특별히 게임에 많이 빠지는 이유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절대로 우리 실제 삶과 무관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 세상은 금수저나 흙수저가 없다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몇몇 어른들은 과거 시절을 운운하며 그것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결코 약해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우리 사회 구조가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고를 수 없었던 부모에 따라) 사회에서 달려가야 할 출발 선상이 대다수에게 동일하지 않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심지어 그 격차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아래 삽화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행복을 찾을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합니다. 

 

특권에 대한 짧은 이 야기 by Toby Morris

 

 

물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과연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가?'라고 화가 난 상태로 반문하는 것이 최근 들어서는 더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생각 속에 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현실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그 가상의 세계는 게임입니다. 또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입니다. 그중에 특히 E스포츠라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특별히 그곳(*E스포츠)에 간 아이들은 이곳은 현실과 다르게 누구나에게나 공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우 적은 금액으로도 실컷 즐길 수 있고, 돈이 많아도, 뒤를 바 주는 사람이 있어도, 부모와 선생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도, 나보다 예뻐도, 구조적으로 더 강한 상태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돈이 더 많은 친구가 더 예쁜 옷을 입고 있어도 가장 중요한 가치인 승패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 게임을 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글로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페이커라는 선수 역시 그 종목 게임의 현금 상품을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진실로 자기는 이런 공정한 세계에서 살고 싶고, 도무지 노력해도 되지 않는 현실 세계에는 되도록이면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임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합니다. 이런 일은 과거에도 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가난하고 환경이 열악한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주변 대부분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터라, 부모들이 집에 자주 없어 저학년 시절부터 주위에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꿈을 심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어떤 직업을 가지면 좋겠는지를 보여주는 조언자도 없었습니다. 동네에서 이래저래 알던 형들이 불량하게 되기고 하고, 그 불량한 형들이 나중에 이 아이가 좀 크니 같이 놀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얼굴도 모르는 타 학교 상급 학생들에게 돈도 뺏기고 심지어 새 점퍼도 뺏기고, 하천 다리 밑에서 한대 두대씩 얻어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숙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대학을 가면 뭐가 좋은 지도, 잘 몰랐던 터라 당연히 학교 생활도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자신이 타인에 비해 매우 초라하게 느껴졌고, 그 후부터는 세상 모든 게 다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방에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에서 하루 종일 게임만 했습니다. 모든 게 힘들었던 아이는 이제 이대로라면 아무런 불만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의 저를 보시면서 과거의 저를 상상하기 어려우실 거라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저에 대한 그림 없이) 그저 이렇게 끝나는 글을 보면 어른들은 불편합니다. "그걸 핑계라고 대는가?"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늘 하는 이야기가 같습니다. 이를 테면 '누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둘은 상호 논점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아이들은 공정한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서 있고 싶은데, 과거와는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을 인지하기를 거부하는 어른들은 불공정한 세상 속에 돌아와 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부득불 언급드리면 이는 둘 다 이해는 됩니다. 저는 올해 40살이 된 어른이자 10살 난 아들이 있는 부모이고, 그 어린 시절의 저의 닮은꼴은 지금 세상에 수도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중에도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고통 속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그 원천적인 욕구는 결코 게임 회사가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서울여자대학교의 김창옥 겸임교수는 사람은 열정, 권태, 성숙의 과정을 거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일에서도, 공부에서도 모든 면에서 같은 패턴을 보인다고 언급합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사람은 이 세 단계에 어떤 단계에 있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단계가 영원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피력합니다. 이를 테면 사람은 누군가를 처음 만나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이 사랑이 영원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마찬가지로 권태에 빠지면 그전에 가치가 있었다고 판단해 열정적으로 그것을 추구했던 것이 한순간에 가치가 없어지는 것으로 판단하며 영원히 이 감정이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권태에서 성숙으로 자연히 그리고 성공적으로 넘어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권태가 찾아오면 보통보다 더 우울하게 되고, 그 우울을 극복 못하면 우울증세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장기화되고 심화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게임의 세계에 몰두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외부로 자신이 그렇다고 말은 하지 않았던) 마치 어린 시절의 저처럼 말입니다.

 

저는 많은 우리 아이들이 권태에 빠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사회를 이렇게 구조화 해온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합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는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것이 게임(*또는 게임의 중독성)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결코 마찬가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인 현실도피도 아닙니다. 오늘 제가 조심스럽게 정확히 언급드리면 그것은 현실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우리 어른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저는 우리라는 이름에서 결코 제할 수 없는 저를 포함해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지금 자성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게임 중독에 빠진 아이들에게, 게임에 빠진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왜 말하지 말아야 합니까? 저는 이 아이들에게 먼저 사과할 것을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가장 먼저 선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관계의 회복이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효력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모든 문제에서 건져내는 것은 언제나 법이나 규제가 아닙니다.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참된 교육입니다. 신뢰의 회복입니다.  


중독치유센터인 라파공동체 상담소의 윤성모 소장은 심각한 중독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을 두 가지로 분석합니다. 그중 첫 번째는 사람의 '인정'(self-esteem) 욕구입니다. 이를 테면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무너진다는 설명입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환경에 처하게 되면, 사람은 이로 인해 무너져가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내가 무의미한 존재라고 생각되는 이유를 누군가, 또는 무언가, 또는 환경에서 찾게 됩니다. 이는 실제로 그 이유가 핑계인가 사실 인가 와는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떠한 이유든 여하튼 이 행위가 중독에 핵심적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 잠에 드는 이유는 실제로는 그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진짜 술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윤 소장은 대부분은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이 오직 술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두 번째는 '자기 통제력' (self-control)입니다. 자기 통제력이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독에 있어 이 자기 통제력의 핵심적인 특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통제력이 없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통제력을 과신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중독 핵심적 특징 중에 자기 통제력 과신의 외형은 거짓말이라는 형태로 드러납니다. 여기서의 거짓말은 남을 의도적으로 속이기 위한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자기 통제력을 과신하는 것에서 오는 본의 아닌 '언행불일치'입니다. 이를 테면 알코올 중독자의 대부분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술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부장님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상갓집에 갔으며 술을 마셨다고 하는 것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이만큼 많이 먹어도 술에 전혀 안 취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안 취했기 때문에 운전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핵심적인 특징 두 가지는 서로 따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종합해보면 이 중독이라는 것은 (*상하거나 다친 것과 같은 것과 달리) 어딘가에 묶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누군가가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통제력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로, 어딘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단히 묶여 있어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저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결코 비껴가지 않음을 자각합니다. 물론 제게 당시 게임을 좋아했는지를 묻는다면 게임 좋아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 묶여 있어야 할 이유가 위에서 설명드린 바와 같이 정말 게임이 좋아서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저에게 언제든지 그 게임을 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는가를 물어도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둘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40살의 저는 실제로는 나라는 아이가 그러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독이라는 것을 접근할 때 물론 치유 또는 치료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묶여 있다는 의미에서는 반면에 해방이라는 단어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어 보입니다. 해방이라는 것은 자유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한번 자유하면 다시는 같은 문제를 겪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이란 의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다시 묶이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중독 치유의 본질은 결국 그 사람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사회에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과 자신을 본질적으로 들여다보게 만듦으로써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기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프로 포커 선수는 도박 중독으로 볼 수 없습니다. 또 같은 의미로 옷을 좀 과하게 구입하는 MD 역시 쇼핑 중독이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 중독은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은 일 중독입니다. 좀 쉬세요. 농담입니다.ㅎ)


글을 정리하면, 아이들은 오늘도 게임에 빠집니다. 그중에 특별한 아이들은 위에서 언급드린 분명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가 치유가 되는가를 물으시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도 자가 치유된 케이스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분명한 중독 증세를 보이는 이유는 그것(*게임)이 너무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가정과 사회가 그들을 중독에 사로잡히도록 구조적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른으로서 이에 대해서 일종의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성의 목소리는 무엇보다도 선행해야 하는 일이며, 그 이유는 진정성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E스포츠는 좋은 대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E스포츠는 게임 산업에 속한 규제 등과 관련이 없기에 배제해야 하고, 게임 문화이기 때문에 이 문화를 직접적으로 활성화하는 사업들을 늘려야 합니다. E스포츠를 활성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공정 경쟁 기반의 사회 공동체 활동이 그 가치 핵심인 E스포츠는 이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사회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도구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아이가 원래 가지고 있는 자기 통제력을 회복하는데도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게임 리터러시 관련한 여러 글'에서 이미 많이 언급드렸습니다. 그래서 E스포츠는 오늘날 이 혼돈 속에 게임 문화 속에 가장 밝게 빛나는 빛입니다. 맨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으신가요? 하루 종일 PC 앞에만 앉아있고 밥도 거기서 먹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은 여러분들의 아이들을 어떻게 인정하시고 자기 통제력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게끔 할 수 있나요? 그 해답이 '사랑'인가요? 물론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않는 부모가 없는 것에 기대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미래를 키우는데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많지만 모든 것은 아니며, 특별히 이것은 구조상 반드시 사회가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사를 포함해 열악한 환경에 놓여 이미 심각한 권태에 빠져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는 아이가 여러분 곁에 있습니까? 그런 아이들은 늘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아이를 사회로 끌어내야 합니다. 그것은 비전문가이며, 사회 그 자체가 절대로 될 수 없고, 또 하나의 약자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책임이 아닙니다. 사회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교육에 중요성을 깨닫고 학교를 설립해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이를 사회로 끌어내어 인재로 성장시키는 모든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오직 부모라면 존경하는 우리의 선진들은 왜 굳이 학교를 설립하였습니까? 대안은 이렇듯 학교(*+센터/+기관)입니다. 그렇다면 이 학교라는 곳에서는 과연 무엇을 가르쳐야 합니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어/수학 등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아이를 그 속에서 꺼내와야 하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제가 감히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키워드는 '위로'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하고 '위로'하여, 먼저 관계를 회복하고, 스스로 자신이 가진 가치를 발견하게끔 유도하여, 우리 사회에 기여하려는 목표를 심어주어야 합니다. 자, 오늘도 우리 곁에는 우울증에 신음하며 울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주세요.

 

by erdc.kr
구마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