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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인사] 2020-01-02

집 뒷 산 북한산 둘레길에 갈 때마다 이곳에 있는 '작은 미생물이나 풀 한 포기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 그곳에 그렇게 있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그 존재 이유가 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다 있어야 하는 곳에 정확하게 있어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것은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과 같이 그저 사실이기에 이 세상이 빅뱅으로 탄생했든지 아니면 신이 창조했던지 그중 무엇을 믿든지와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사실을 두고 '실제로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전부 우연에 의한 결과라고 믿는 것은 반대로 참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 즉은 내가 이 세상에, 또 특별히 이 시기에, 존재해야 할 아무런 그래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내가 지금 하는 일도 아무것도 예측될 것이 없으니 내가 꼭 나의 생각과 주장대로 그렇게 해야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실체가 그렇지도 않은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들을 굳이 우연이라고 믿는 것은, 틀린 그 힘든 생각을 스스로 하게끔 자처하는 것이기에 매우 슬픈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딘가에 가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 것과 하필이면 그때 만나게 된 것과, 또  이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과 그때 그 이야기를 듣는 것과, 오늘 내게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것과 실제 그 일이 되게끔 되는 것도 전부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치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의 이치에 의해 돌아갑니다. 마치 그것은 이 세상 어디서든 내 손에 들려 있는 돌을 놓으면 땅에 떨어지는 중력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중력에 대해서 그 이치만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편협한 사고라고 할 수 없습니다. 톱니를 만들었는데 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한번 오고 가는 것이 이치일진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믿는 것을 편협한 사고라고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것도 이치이고 저것도 이치라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를 혼란케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이치를 말할 때는 '네 말도 맞고 또 니 말도 맞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치는 하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근거를 가지고 말하며, 그래서 서로 말이 통합니다. 

 

이 세상은 가지고 있는 이치를 아는 지식에 근거하여 어느 수준까지는 예측이 가능합니다. 많이 먹거나 급하게 먹으면 탈이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님께 '그러다 탈 난다'는 지적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가능성임으로 탈이 날 수도 있고 안 날 수도 있습니다. 즉, 예측이란 일기 예보처럼 지식에 근거하지만 어느 정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이치를 아는 수준 이상은 예측조차도 안됩니다. 이 이치를 아는 지식은 시대를 지나면서 쌓여갑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모르고 못했던 것이 현재는 가능하기도 합니다. 또한 현재 못하는 것도 미래에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아직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과정에서 또 이와 같은 역사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체감할 수 없는 정도의 작은 변화를 체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체험이 쌓여 큰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때가 내 앞에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혁신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혁신이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일 일어나는 작은 변화들이 우리가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는 근본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또한 목적 자체가 혁신의 때를 먼저 알기 위함도 아닙니다. 어느 상황에서건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은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람은 그저 이치 속에 명확하게 존재하게 되고 또 이때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질문을 할 때 한 가지를 반드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최선을 다했다. 오늘 내가 할 것은 다 했다." 이것을 스스로 알아야 그러한 삶의 태도가 최선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삶의 후회가 남지 않게 됩니다. 한 사람이 이 시대에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것이 무엇이 든 하루를 쉬면서 즐길 수 있어도) 절대로 시대가 맡긴 중요한 오늘의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존재 이유에 대해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네가 이 시대에 태어나 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자랑스럽고 감사해!" 이 삶의 태도가 있어야 만 우리의 삶에서 기회가 왔을 때 반대로 이치에게 질문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이때 존재하는 이유가 이 일을 위함입니까?"

모든 영웅이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진정 태어나며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연장 선상에서 보면 3번의 신년인사와 4년 차에 접어들고 있는 이 웹사이트도 분명 이 시기 이 장소에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산업에서 변화하는 상황들을 찬찬히 보면 어떤 식으로든 이 시대 이 산업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상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 웹사이트에서의 톱니가 누군가에게 맞물릴 때, 분명 다른 변화들에 촉매가 되었기 때문이라 믿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이 제게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치에 근거하여 분명히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은 순리상 진즉이 없어져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 회사 소개에서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시대가 원하지 않으면 (*있다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순간에서나 '존재'와 '존재함으로 인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욕망이나 사람의 좋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혜를 알아채는 지식에서 비롯됩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은 추종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손에 잡히는 그 실질적인 것을 찾아 헤맵니다. 오직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것만이 의미가 큰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전부 관념적인 것으로 치부합니다. 심지어 겉만 번지르한 이야기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오히려 실질적이라고 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사상누각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피티림 소로킨 교수는  <사회 이동 Social Mobility>라는 저서에서 모든 문화는 ①관념문화 ②이상주의 문화 ③감각문화 이 총 3가지 단계를 통해 탄생, 성장, 쇠퇴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하면 관념 문화에서는 변하지 않는 이치와 진리에 대한 관심과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상주의 문화 단계로 건너가게 되면 관념문화와 감각문화를 절충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위와 같은 진리와 가치에 관심을 가지지만 실질적인 것도 중요하다고 하는 경향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감각 문화 단계가 되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즉, 즉각적으로, 또 실질적으로 체감과 체험이 가능한 것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그 문화에 속한 사람은 오직 감각적인 것에만 반응을 하는 형태로 변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피티림 소로킨 교수님은 실질적인 것에 치중하는 것이 반드시 좋다 혹은 나쁘다는 관점에서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실질적인 것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것(*감각문화 단계로 접어들면)은 문화에 발전에 저해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그 문화가 쇠퇴하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예시로 들고 있는 것은 로마입니다. 교수님는 헬레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의 문화를 사실상 계승하여 발전시켜온 로마가 (*모든 인간의 문화가 그리 했던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감각 문화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쇠퇴에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로마가 그 이후로도 도합 1,0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쇠퇴하는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젊은 사람들이 감각문화에서 벗어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는 그 새로운 사상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는 않을 계획이지만 다만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의 쇠락하는 문화를 구원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습니다. 실제로 그 사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와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적용은 조직 문화에도 또 기업 문화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문화 단계 속에는 결과론적으로 3가지 형태의 사람 간의 소통이 있게 됩니다. 첫 번째는 '(*손에 잡히는) 현상만 있는 그대로 펼쳐 놓는 것', 두 번째는 '현상을 번지르하게 표장 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현상보다는 내재되어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감각 문화에 젖은 많은 사람들은 세 번째와 두 번째를 (*사실상 구분 없이) 모두 무시하고 첫 번째에만 특히 관심을 가집니다. 우리 모두는 조직 내에 있기 때문에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오늘 실제로 벌어야 하는 이 돈이 내일 우리 아이들의 월급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도 간과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 세상에는 세 번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류의 사람들은 이 세 번째를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이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리 산업의 후배님들이 보다 본질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존의 설립자인 제프 베조스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은 발표 자리에서 아마존의 한 미래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을 하루에 한 바퀴 도는 비행하는 물류창고였습니다. 이 물류창고는 미국을 하루에 한 바퀴 도는데 AI가 탑재된 드론이 각각의 택배를 각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베조스는 모든 미국 본토 지역의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하면 그 사람이 어디에 있던 하루 만에 배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는 여기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앞에서 언급한 3개 중 몇 번째에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까? 혹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서로 무엇이 다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 번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입니까? 첫 번째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베조스'는 그저 미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각각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야 그저 '와 저런 생각도 가능하구나'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어떤 판단을 할까요? 아마도 아마존에 투자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차이는 우리는 거의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차이는 이 세상을 아는 지식과 지혜가 있는가 없는가에 차이입니다. 그리고 지식과 지혜가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권위가 생깁니다. 반대로 지식과 지혜가 없는 사람에게는 권위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우리는 쉽게 돈이 최고라고 말하지만) 돈이 많다고 권위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있으면 권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업자는 자신의 말에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2세는 증명을 해야 합니다. 그 증명은 절대로 (*아버지가 벌어 놓아 받기만 한) 돈이 아닙니다. '스스로 이 기업을 이끌어갈 지식과 지혜가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리 돌고 돌아도 지식과 지혜로 귀결됩니다. 마윈 회장님이 하는 말, 손정의 회장님이 하는 말, 워렌 버핏이 하는 말, 스티브 잡스가 하는 말, 마찬가지로 제프 베조스가 하는 말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렇게) 지혜와 지식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늘 세 번째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Source:  Strategic Communications

 

다만 좋은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생활은 실제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매우 실질적인 일을 잘 수행해서 비교적 적지만 확실한 이윤을 남겨야 같이 일한 동료들과 함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정직히 행하고 성실하다면 커뮤니티에 소문이 나고 사회의 큰 변혁이 없는 한 세상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 그렇지 않지만 이 첫 번째에 특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뚜렷한 한 가지 특징은 (*크게든 작게든) 다분 냉소적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든 아니면 안 하고 있든 관계없이) 누군가 매우 근원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일단은 (*손에 안 잡히는 것이기에) 허울 좋은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냉소란 차가운 웃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단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냉소라는 단어를 쓸 때는 이 '차갑다'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차갑다는 것은 곧 이성을 상징합니다. 그러하기에 이 냉소란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반대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웃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냉소적으로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를 알려드리면 보통 사람은 자신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실망을 하게 되는 일을 겪으면 냉소적이 됩니다. 우리는 대체로 막연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을 이루지 못할 때 실망합니다. 그리고 그 꿈에는 늘 누군가가 함께 있었고 그 꿈을 사랑했던 것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실망을 하고 싶지 않아 지게 됩니다. 실망은 경험이 되고 경험은 지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적용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현실의 직시란 그렇게 아는 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예측하지 못하는 것들(*변수)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도전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이상 괴로운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룰 수 있는 꿈만 꾸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이는 전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 누구도 여기서 절대적으로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이룰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꿈 전체를 일단은 부정하는 것이 냉소의 시작이며 이는 분명히 지식에 근거하는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이란 전부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합니다. 그래서 이 냉소는 실제로는 사람(*인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상실임과 동시에 일종의 경험을 통한 성숙입니다. 사람을 믿지 않고 사실(*FACT)만을 보려고 하는 태도가 냉소적의 전형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누군가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사실에 기반하지 않는 이야기에 냉소하는 것입니다. 냉소적인 사람은 냉소를 이성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비판을 그 결과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확실히 알려진 것에 대해서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냉소 자체가 사람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다른 단어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냉소적인 사람이라도 마치 그러한 사실을 감추는 것 마냥 밝은 캐릭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사실은 어울릴 것과 같은 단어인 '이기적이다'와 같은 단어보다 꽤 이타적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면만 보자면 주로 냉소적인 사람들이 성공하게 되면 상처 받은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돕고 기회를 주어 인재를 세우는 편입니다. 그런데 실패하면 (*'왜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지?' 하면서) 과도하게 자신에게 그 탓을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냉소적인데 좋은 캐릭터를 지닌 사람은 좋은 기업에서는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과 같은 사회 변화의 과정에서 혁신이 일어나면 우리의 성실과 또 우리의 경험에 근거한 지식과 상관없이 지금 하는 일이 가치가 없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는 좋은 기업이기 때문에 계속 이대로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라고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볼 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미래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우리는 사람이고 인류라고 표현하기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를 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초등학교의 모든 교과과정을 태블릿에 담아 학생들에게 나눠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할 수도 있고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가능해진다면 교과서 책을 인쇄하던 그 업계에서의 성실하고 경험 많고 좋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 회사가 망한다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절대적인 인쇄 부수가 줄어들지도 않을 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분명 좋은 기업이어야 합니다만 그 좋은 기업이 세월 전체적 입장에서는 영원을 위한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다른 필요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이 냉소적이든 아니든) 가치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이처럼 다른 필요 요소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누군가가 하고 있는 기 존재 사업과, 거기서의 데이터와 한계가 명확한 첫 번째 일에서, 밝은 미래를 찾는 것을 오히려 반대로 허울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심하게는 그 명확한 데이터를 논리를 위해 손댄 흔적을 발견하게 되면, (*지식과 지혜에 근거하기에) 그것이 거짓 또는 허풍이라는 것도 금세 알아차립니다. 거짓이나 허풍을 하게 되면 심지어 좋은 기업이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실질적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그 실체(*혹은 한계)를 파악하기 위한 매우 건전한 의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나라의 이 산업을 위해 우리 중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 누구에게는 확실히 좋은 기업 이상의 그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 번째를 이야기하는 CEO에게 있는 그 무언가입니다. 비행하는 물류창고를 말하거나, IT 산업의 300년 계획을 가져오라고 말하거나, 앞으로는 (*기기의 성능이 아닌) 아이튠즈가 핵심가치라고 말하는 그 무언가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손뼉을 치면서 이해하고 환호하는 투자자들과 함께 곧 이어질 혁신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사실은 우리의 처한 현실과 상황에 따른 판단이 얼마나 경험에 근거하고 객관적인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진행됩니다.  

 

세상에는 나쁜 기업들만 있을 듯 하지만 그들이 조명을 많이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도를 걷는 좋은 기업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좋은 기업들이 전부 위와 같이 위대한 기업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위대한 기업 중에는 나쁜 기업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나쁜 기업은 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 나가도 우리는 그 기업을 위대하다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좋은 기업에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위대한 기업이 될 것인가를 오늘날 판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좋은 기업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머물 것인지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할 것인지를 오늘날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위대한 기업은 가치에 기반한 꿈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특별한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꾸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꿈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함께 노력해 그 꿈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에는 늘 인류의 진보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그러한 시스템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이 만들었던 회사에서 퇴출당했던 스티브 잡스가 다시 자신의 회사로 복귀할 수 있게 된 근거는 (*확실히 여기서 말씀드리지만) 절대로 우리가 실질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즉 "내가 무언가를 개발할 수 있어요", "나는 무슨 기술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확실해요"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실질적이고 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감각문화 단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뜬구름을 잡는 소리 같은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위대한 기업의 위대한 리더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관념문화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사람입니다. 꿈을 꾸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나폴레옹처럼 한겨울에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전혀 실질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알프스 산맥을 우리는 넘을 수 있다고 말하는 리더가 위대한 리더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꿈에 동참해서 승리를 따 내는 것입니다. 다만 좋은 기업의 좋은 리더는 산을 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실질적으로 설명하는 좋은 사람들의 의견에 적극 동의하기에 산을 넘지 않는 결정을 합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드리면 모든 기업이 모든 상황에서 전부 위대한 리더가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좋은 리더들이 더 필요한 기업들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위대한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은 예를 들어 어떤 상황입니까? 우리에게 어떤 위기가 있어 누군가의 리더십에 의지해 이 위기를 극복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되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또 여기까지는 잘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스티브 잡스는 복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붙입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이 산업(*많은 좋은 기업들을)을 이끌어 가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가진 위대한 기업'입니다.  

 

정리를 하면 좋은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리더가 필요하고 위대한 기업이 되기를 원한다면 위대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리더는 (*도저히 실질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꿈을 가진 리더입니다. 위대한 리더가 꾸는 꿈이 선한 꿈이면 위대한 리더는 위대하기 위한 좋은 리더입니다. 선한 꿈이란 널리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꿈을 말합니다. 위대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래서 먼저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글 서두에 설명한 바와 같이 우연은 없으며 톱니바퀴와 같이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는 지혜의 근본입니다. 다른 말로는 깨달음입니다. 세상의 이치는 모두에게 지금도 공개된 것이기 때문에 이는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철학, 종교, 신념 등과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입니다. 신을 믿지 않아도, 인문학과 이성을 믿지 않아도, 세상은 그저 복불복으로 가득 찼다고 말해도 (*아무 상관 없이) 공개된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충분히 세상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세상 이치를 깨달으면 심지어 신을 포함한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누구에게도 어느 사상에도 의지하지 않은 채 스스로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위대한 리더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그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는 매일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가?", "나는 과연 혁신의 때를 맞을 준비가 되었는가?", "시대가 내게 맡겨준 사명을 감지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람들에게 이 혁신을 설명할 것인가?" 이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도 매일 해야 합니다.

 

이제 글을 마칠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리더인가요? 그리고 지금 여러분의 회사는 지금 어떤 리더를 필요로 하나요? 여러분의 회사는 어떤 회사가 되고 싶어 하나요? 그 질문에 2020년 올해는 답을 내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올해는 여러분께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그 알아낸 사실을 전달하시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구성원들이 올해 많이 지치셨나요? 위로가 필요하신 가요? 물론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내가 너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상호 공감의 감정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만약 연초에 권위가 있다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는 우리 회사 대표, 우리 회사 팀장, 바로 내 옆에 있는 존경하는 그분으로부터,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메일을 받게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공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지 않을까요?

 

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하며 올해도 여러분들이 가는 길에 이스포츠연구개발원이 늘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 구마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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